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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별이고’란 말이 사무친다

기사승인 2018.05.14  09: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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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정도가 클수록 이별하는 고통은 커진다

▲ 김영진 불교학부 교수

불교 문헌 가운데 유가사지론이란 책이 있다. 불교학자들도 대단히 어려워하는 글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겪을 법한 이야기도 있다. 불교에서 흔히 이별의 고통을 말할 때 쓰는 ‘애별이고’란 말도 여기 등장한다.

‘애별이고’란 말은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고통을 가리킨다. 개인의 경험정도에 따라 ‘이별’이라는 말은 그 무게가 다르다. 사랑하는 가족과 죽음으로 이별한 경우는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다.

지난 겨울 나도 이별을 경험했다. 방학 중에 경찰행정공공학부 주재진 교수가 갑자기 사망했다. 나는 20대 초반 주교수와 같이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가 불교학과 기숙사 기원학사에 일반학과 학생으로 입사한 그 봄날을 나는 기억한다. 예의 바르고 언제나 씩씩한 후배였다. 유도 도복을 입고 맨발로 교정을 단체 구보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사망 며칠 전에도 주교수를 만났다. 테이블에 잔뜩 쌓인 보고서 자료를 보고 예나 지금이나 참 열심히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비보(悲報)가 날아들었다.

장례식장에서 주교수의 가족을 보는 순간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듬직한 아들이자 자상한 남편이고 든든한 오빠였을 그를 생각하니 쓰라렸다. 집에 돌아와서도 자꾸 눈물이 났다. 운전하다가도 자주 시야가 흐렸다. 서러웠다. 그의 덧없는 죽음이 서럽고, 우리 삶이 그저 그런가 싶어서 또 서러웠다. 강의실에선 제행무상을 가르치고, 존재자의 실체 없음을 진리처럼 읊어대는 나지만 진흥관 앞 벤치에서 그의 부재를 확인할 때면 괴로웠다. 커피마시고 담배 피고 담소하고 있는 주교수가 보일 듯 하지만 결코 그런 일은 없었다. 진흥관이 이젠 두렵다. 그래도 그 앞을 지날 때면 나는 여전히 주교수를 찾는다.

죽음이 뭔지, 이별이 뭐지 또렷이 알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고통을 안기고, 그래서 누군가는 슬프고 괴롭다는 사실은 잘 알겠다. 하기야 ‘원증회고’란 말도 있다. 원망하고 증오하는 이를 다시 만날 때 겪는 고통이다. 그것은 애별이고와 사뭇 다르다. 두 가지 고통의 차이는 고통의 양이나 강도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성격의 차이다.

원증회고는 싫음에서 그 고통이 시작 하지만 애별이고는 좋음에서 그 고통이 시작한다. 사랑하고 아끼는 정도가 크면 클수록 그와 이별하는 고통은 크리라. 그와 맺은 인연이 깊을수록, 그리고 그와 쌓은 추억이 두터울수록 이별의 고통은 한층 깊고 무겁다. 사랑이 뜻밖에 괴로움이 되는 역설이다. 붓다는 춘다라는 이의 공양을 받고 탈이 나시고 얼마 후 자연인으로서 죽음을 맞이한다. 붓다는 임종 직전 제자들에게 춘다를 비난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붓다는 왜 그랬을까? 붓다는 춘다가 괴로움 때문에 사랑을 후회할까봐 걱정했다. 붓다의 임종이후 춘다는 “그때, 내가 왜 붓다를 공경하여 공양을 준비했을까? 그렇지 않았으면 붓다께서는 아무 일 없었을 텐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애별이고는 이렇게 좋음을 후회하게 만들기 때문에 잔인하다. 내게는 아직 좋은 기억과 부재의 고통을 분리시킬 재간이 없다. 아마 한창 걸릴 것 같다. 만남이 넘치는 꽃피는 봄날이지만 나는 여전히 지난 이별에 잡혀 있다. 제대로 배웅도 못한 조교수가 떠오른다. 망자(亡者)여! 그 길 부디 편안하소서.

동대신문 dgumedia@naver.com

<저작권자 © 동대신문 경주캠퍼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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