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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문화재자료 동경관

기사승인 2021.11.19  15: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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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면으로 보는 숨겨진 경주

조선시대 왕을 상징하는 전패 모시던 객사

▲ 경주박물관 소장 전패

신라 ‘만파식적’이라 불리는 옥피리 등 보관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를 합친 이름이니 경주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경상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그래서 현재 남아 있는 경주향교도 우리나라 2대 향교에 꼽힐 만큼 큰 규모를 자랑하고 경주부를 다스리던 부윤도 각도의 관찰사와 같은 종2품으로 전라도 관찰사가 전주부윤을 겸하던 것과 달리 경주는 경상도 관찰사와 별개로 부윤이 임명될 정도로 지금의 광역시급 위상을 자랑했다.

▲ (좌) 동헌에 있던 경주부윤의 직무실 일승각 / (우) 동경고나 서헌 정면(위)과 후면(아래)

이에 경주부윤이 직무를 보던 동헌은 일제강점기 경주군청으로 사용되는데 군수로 임명돼 직무실(일승각)을 마주한 일본인조차도 과분한 느낌이 든다고 할 정도로 그 위용을 자랑했는데 그 건물이 지금의 대릉원 후문 맞은편 법장사의 대웅전 건물이며 동헌의 정문이 법장사의 대문이다.

 그러나 경주에는 부윤의 직무실보다 더 큰 규모의 건물이 있었다. 바로 객사인 동경관이었다. 객사를 이렇게 크게 지은 이유는 살아있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와 궐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홍살문을 세워 신성시하였고 사신(使臣) 등이 오면 유숙했으며 각 고을 읍성 내에 가장 가운데 위치했다.

▲ (좌) 동경관 정문의 동경구도 현판. / (우) 3동의 건물이 하나로 합쳐진 삼동일체 동경관의 옛모습.

동경관은 원래 신라 왕실에서 집기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정조 10년(1786)경에 다시 지은 것으로 일부만 남아 있다. 삼동(정청·동헌·서헌)일체 건물이었던 것을 일제강점기 초등학교로 사용하다가 해방 후 철거하고 서헌만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건물을 옮기기 전에는 정청에 조선 태조의 위패를 모셨다.

1882년(고종 19) 부윤 정현석이 동경관이라 편액 글씨를 썼다. 이때 그는 글씨를 쓴 뒤 낙관에 ‘신 정현석(臣 鄭顯奭)’이라 할 정도로 동경관이 가지는 위상과 권위를 짐작할 수 있다. 정문에는 영조 때 명필 최석신이 쓴 ‘동경구도(東京舊都)’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삼국유사에 월성의 천존고에 보관하던 '만파식적'은 신라가 멸망하면서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바쳤다가, 고려 광종 때 경주에 객사 동경관을 새로 지으면서 이 건물로 옮겨 보관했다고 전한다.  만파식적을 보관하던 상자의 자물쇠 부분에는 월성, 월지, 첨성대 등이 선각으로 새겨져 있고, 자물쇠 자체의 모양은 에밀레종의 모양을 본떴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동경관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이 피리도 불에 타, 세 조각으로 깨졌는데 이것을 납으로 땜질하고 그 위에 은테를 둘러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전해져 내려오던 이 옥피리는 다시  임진왜란 때 경주 관아가 쑥대밭이 되면서 없어졌다. 

그 후  광해군 때의 경주 부윤이 '신묘한 옥피리가 없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면서, '옥피리의  옛 모습을 상고하여 새롭게 만들어 보관하라'는 명을 내리게 되는데 이것이 노란색의 옥피리이다. 이러다가 조선 숙종 16년인 1690년, 동경관에서 근무하던 향리 김승학이 폭우로 무너진 동경관의 담장을 보수하다가 전란 중에 누군가가 감추었던 것으로 보이는 문제의  옛 옥피리를 찾아낸다.

김승학은 죽을 때까지 이 피리를 집으로 가져와 몰래 보관하였는데, 그가 죽자마자 당시의 경주 부윤 이인징이 그의 유족에게서  이를 압수하여 다시 동경관에 갖다 놓았다.

▲ 만파식적이라 불리는 옥피리와 보관함 장식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나 전시하고 있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2013년 ‘조선시대의 경주’ 특별전에서 옥피리와 동경관 현판 등이 전시되었는데 앞으로 조선시대 경주를 주제로 하는 특별전을 또 기대해 본다. 그리고 이 옥피리는 어떤 소리를 낼까? 하는 개인적 궁금함도 해결되었으면 한다.

문화유산해설사

신라마을 대표

이진호

 

※ 객관은 외국 사신이 머무르는 숙소로 서울은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숭례문 안 황화방(皇華坊)에 두었던 태평관(太平館), 역시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돈의문 서북쪽의 모화관(慕華館), 일본 사신은 동평관(東平館), 야인(여진)을 접대하던 북평관(北平館)이 있었고 각 고을에 객사(客舍)를 두었는데 각 지역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 불렀다.

 고려시대 평양을 서경, 경주를 동경이라 불렀기에 경주는 동경관(東京館), 전주는 풍패지관(豊沛之館), 개성은 대동관(大同館)으로 명명되었는데 한 고조 유방이 패군 풍현 사람이므로 풍패는 건국의 시조나 제왕의 고향을 지칭한다. 전주 객사를 풍패지관이라 칭한 이유는 조선건국의 시조 이성계의 본관이 전주이기 때문이다.

동대신문 dgumedia@naver.com

<저작권자 © 동대신문 경주캠퍼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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